호모 디기탈리스 Homo Digitalis – 염소진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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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디기탈리스  Homo Digitalis – 염소진 개인전
2016. 08. 13. ~ 08. 27
 

싱가폴, 단채널 비디오, 3’22“, 2016

애연한 너와 나의 거리, 다채널 비디오, 3‘12“, 2016

 

 

인터뷰 영상 /   무제 , 단채널 비디오, 7‘10“, 2016

 

 

작가 노트

 

친구나 애인을 만날 때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핸드폰에 집중한다. 카페에서 각자의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공유하는 모습은 이제 낮익은 풍경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고립시키고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이란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연인은 나에게 자주 핸드폰을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와 시공간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럴듯한 이야기와 함께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여념이 없었다. 당시엔 그러한 과정들이 관계 유지의 필요에 따른 당연한 행위라 믿었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머리속에 희미한 핸드폰 불빛이 그에 대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작지만 강렬한 액정모니터를 통해 웃고 운다. 이제는 익숙한 이 작은 디지털 기기의 불빛은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여념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통을 하는 것일까? 나에겐 그저 희미한 핸드폰 불빛만이 추억아닌 알 수 없는 흔적으로 남겨졌다.

 

 

염소진, 호모 디기탈리스 Homo digitalis의 애연한 풍경들 

민병직(대안공간 루프,  협력 디렉터)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 삶의 풍경이 사뭇 달라지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특히나 인터넷 미디어의 환경의 급속한 발전과 그 여파로 인한 것들, 이른바 SNS가 일상의 중심축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변화를 그 주된 이유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를 뜻하는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현실의 실재적 관계 이상으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간극을 메워가면서 새로운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제약은 물론 현실과 가상마저 내파시키고 있는 온라인 공간 속의 사회적 네트워킹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면서 이를 매개로 과거에는 미처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관계들을 엮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이나 모순적이기만 한데, 과잉 정보로 넘쳐나지만 결핍이라 해야 할 정도로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들이 위계화, 독점화, 상업화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접근에 있어서조차 일정한 제약과 한계가 있는 경우들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온라인 네트워킹으로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관계들을 구축해가고 있지만 결국은 표피적이고 납작한 관계의 풍경(flatscape)에 다름 아닌 모습들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파급 효과나 여파들로 들로 인해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일상의 풍경조차 변모시킬 정도로 이전과는 다른 의미심장한 상황들을 직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심쩍은 디지털 시대의 풍경이 이번 전시에서 염소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들이다. 작가는 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세상을 향해, 얼마간 의뭉스러운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세운다.

이번 전시의 메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4채널 영상인 <애연한 너와 나의 거리>는 이러한 시대의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나 모순적이기도 한 모습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작업이다.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들조차 대신할 정도로 저마다 자신의 핸드폰에 집중하면서 삶의 온갖 희비와 애락마저 함께 하고 있는 우리 내 일상적 삶의 기이하고 모순적인 모습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극적인 풍경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현실의 잡다한 맥락을 제거한 채 오로지 핸드폰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비교적 단순한 방식의 이미지들로 전경화 시킨다. 마치 살아있는 대상을 대하기라도 하듯 제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들로 핸드폰 기기를 진지하게 대하지만 그저 작은 핸드폰의 액정만을 응시할 따름인 이들 군상들의 이미지들만으로 그렇게 변화무쌍한 우리의 일상을 단순명료하게 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동시에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한 모습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일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현실의 우리들 그대로를 닮아있는 것 같아 묘한 슬픔들이 배가되기도 한다. 그동안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우리 일상의 속내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 같기도 하다. 이 영상 작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휴대폰의 액정의 작은 광원만으로 사람들이 모습들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유난스럽기만 한, 미디어 의존적인 면모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독특한 습관이나 무의식인 제스추어는 물론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미디어가 직조하는 환경 속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적인 관계들로 서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의존한 채로 가상의 공간 속에서 서로를 확인해야 하는 이러한 씁쓸한 모습들이 작품의 제목처럼 애연(哀然)하기만 하다. 가뜩이나 사회문화적인 이유들로 인해 나 홀로 문화가 확대 재생산 되고 있는 이 외롭기만 한 시대의 디지털 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정보를 탐색하듯 서로를 알아가고, 문자, 이미지, 문자, 동영상 등 숱한 미디어를 통해 서로를 소통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전하는 것처럼 결국은 어두운 무대 속에서 저마다 홀로 각자도생하듯 작은 미디어에 의존한 채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인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는 동시대 인간에 대한 존재론이자 지금 시대에 관한 어두운 성찰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맺으며 삶의 희로애락마저 함께 하고 있지만, 이는 그만큼 역으로 일상의 세세하고 내밀한 삶마저 감시되는 디지털 판옵티콘(digital panopticon)의 작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시와 훈육조차 디지털을 통해 더욱 촘촘히 얽혀지는 그런 세상 말이다. 물론 일견,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로운 디지털 온라인 네트워킹으로 훨씬 더 자유로운 소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외면적인 효과일 뿐, 우리는 세상과 타자와의 부단한 소통을 위한 자유로운 몸짓만큼이나 디지털 네트워크 시스템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면서 또 다른 감시와 통제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공간 속에 각자도생하며 오로지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 속엔 이미 디지털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같은 면모들이 녹아 있다. 서로를 수많은 방식들로 접속하고 관계를 맺어가지만 그리고 그렇게 소통하고 믿고 있지만 실재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 관계에 있어서는 단절일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상황들을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지금 시대의 현실적인, 그러나 결국은 단절과 소외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모습들을 씁쓸한 풍경으로 도해한다. 서로의 간극과 거리를 메워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텅 빈 공허만을 확인하게 되는 디지털 시대의 외로움이나 허무함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서로의 관계에 대한 숱한 기억들조차 결국은 핸드폰의 희미한 불빛처럼 흐릿해져가는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런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엮어가는 이 시대의 슬픈 비가(悲歌)이자, 그러한 시대에 대한 아쉬움의 흔적들이 가득한 역설적인 지표(index)처럼 작동한다.

앞선 작업이 전시의 중심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지금 시대의 전체적인 풍경을 전경화시켜 그려내고 있다면, 그 이면의 속내를 담고 있는 인터뷰 영상 작업인 <뒷모습>은 이들 메인 이미지를 보완하고 상술하면서 일종의 레퍼런스로 작동하면서 작가의 화두를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으로 자리하도록 한다. 메인 작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혹은 아카이브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공감을 십분 자아내는 이들 인터뷰들은 전체적으로 디지털 미디어 소통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과의 단절감이 증폭되고 있으며, 이런 이유들로 인해 외로움과 소외를 느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의 상황들이 덤덤히 기술된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혹은 더 다층적인 타자와의 관계를 위해, 마치 중독처럼 인터넷을 떠돌며 수많은 사이트에 접속하면서 가상의 관계들을 엮어가지만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속내들이 유감없이 토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인위적이고 가상의 네트워크의 세상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단절감이나 괴리감들로 인해 불안해하면서도 다시 디지털 미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디지털 중독의 면모들이 담담하게 전해진다. 영상에서 전해지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환한 장밋빛 현실 이면의 실질적인 우리들의 어둡기만 한, 이 시대의 또 다른 모습들일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가 복잡하고 이질적으로 혼융되면서 겪게 되는 지금 시대의 모순적인 풍경들 말이다. 이는 동시에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가 접점을 이루었던 80년대에 태어난 작가의 현실적인 고민들로 그려진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동안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가 복잡하고 이질적으로 얽혀있는 지금 시대의 역설적인 풍경들, 그 간극과 괴리에서 빚어진 불안하고 음울한 모습들이나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부)적응 과정에서 야기된 강박과 집착 등의 갖가지 모순적인 상황들을 가시화시켜 왔다. 지금 시대의 또 다른 우리들의 모순적인 자화상이기도 할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의 존재론을 향해 말이다. 더 많은 자유를 향해 수없이 많은 가상의 네트워크 시스템과 접속하고 있지만 결국은 고립된 채 홀로 모니터만을 대해야 하는 디지털 히키코모리 같은 우리 시대의 모습들, 그렇게 자유와 효율성의 투명사회가 아닌 또 다른 감시와 통제 하에 놓여있는 이 시대의 무기력하고 공허한 존재론 말이다.

애니메이션 작업인 <싱가폴>은 디지털, 아날로그 문화가 뒤섞인 이러한 시대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는 영상이다. 모호하고 애매한 영상과 텍스트로 가득 차 있는 이 작업은 타국의 낯선 풍경만큼이나 묘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모순적인 이미지들은 단순히 작가의 레지던시 장소이기도 했던 싱가포르에 대한 지리적, 공간적 경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그동안 꾸준히 천착해온, 음울하고 공허한 이 시대의 역설적인 풍경을 압축적으로 가시화시킨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위태하게 구축된 구조물들 사이사이로 터질 것만 같은 폭탄 이미지를 배경으로 검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가 하면 아메바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는 이 기이한 풍경의 애니메이션의 묘미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자막에 있다. 파편화되고 단절된, 그리고 불연속적인 의미들로 이어지는 의문스러운 텍스트들이 묘한 이미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타국의 낯선 경험을 토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뒤죽박죽 서로 얽혀있는 이 잡동사니 같은 세상에 대한 작가의 단상들이 의미 없음의 있음처럼,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의미를 엮어가는 식이다. 동시대의 종잡을 수 없는 세태와 상황들에 대한 작가의 복잡다단한 심경들을 담아낸 혼잣말,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잡다하고 무의미한 것들로 엮어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역설적이고 공허한 풍경을 향한 외롭고 쓸쓸한 독백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공허를 거머쥔 호모 디기탈리스 Homo digitalis

Kay Kang(미술 비평가, 자유 기고가)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는 결코 “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그는 무리의 일부로 등장할 때조차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익명으로 나타나지만 대개 일정한 특징profil을 지니며 그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아무도 아니”기는 커녕 누군가로서 스스로를 전시하며 주목받고자 애쓴다. 반면 아무도 아닌 메스미디어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목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워져 있다. 그는 군중 속에 녹아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행운이기도 하다. 그는 아예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익명일 수도 없다. 반면 호모 디기탈리스는 자주 익명으로 등장하지만 아무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군가이다. 익명의 누군가인 것이다.”
– 한병철, [투명사회], p 130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를 창조한 디지털 파놉티콘은 포르노 사회의 기틀이다. 우리는 보들레르가  [실재의 종말]에서 경험한다고 이야기했던 17세기 후반의 원근법적 파놉티콘 세계관과 전혀 다른 비원근법적 파놉티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디지털화를 통해 가능해진 이 비원근법은 절대 독재로부터의 감시나 통제 즉 일방적 외압이 아닌 다양한 내면으로부터 억압이다. 여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개인은 감시하는 자와 당하는 자, 양쪽 모두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간수와 죄수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만 한다. 자청해 감옥에 갇혀 자신을 감시하는 이런 역할극은 언뜻 모두가 만족할 만한 정서적 쾌감을 구한 것처럼 여겨진다. 디지털 매체로부터 나르시시즘의 확장을 강요받아 이룩한 개인의 정서와 감정들이 과연 행복일까.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디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다지털 인터넷을 살찌운다.”

이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장착한 여러 디지털 매체에게 주체적 구속을 받는다. 자의든 타의든 선택한 자아를 통해 통제정보를 전달하는 감성매체에 투영된 노출과 관음으로 뒤엉킨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자기애의 발현의 종국은 언제나 허무하다. 동시대 주변성들로부터 디지털 파놉티콘은 끊임없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감시체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구속시켜 공허를 얻는다. 이 디지털 연극이 주는 허구의 유희는 그 순간 황홀하지만 사람들은 연극의 뒤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셀피 이후 밀려오는 감정들은 연극적 허구를 갈망하다 지친 가면persona을 쓴 관객이자 배우, 그리고 연출가이다. 나와 당신이 얻으려 했던 것은 분명 공허한 포르노적 셀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연극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다.

염소진은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이런 의문에 줄곧 사로잡혀 있다.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후 밀려오는 관계의 부재와 공허 –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왜 기인하는지 알고 싶다. 카페에 앉아 직접 소통을 외면하거나 묵과한 체 마주 앉아 각기 다른 상상계의 자아를 찾아 사라지는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들을 관찰하며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얻는지 궁금하다. 너와 나, 염소진은 당신이 아닌 우리에게 질문한다. 자아가 투영된다고 믿고 있는 디지털 매체 속 다양한 소셜미디어와 메신저들이 연결해주는 우리는 우리인지, 지금 이 순간조차 마주보면서 직접소통의 기회를 상실해가는 호모 디기탈리스들에게 과연 거리의 파토스가 존재하는지 말이다.